비주체의 소중한 본질을 위한 정동적 조각
채은영(큐레이터)
수출입을 위한 항구, 철길, 공항을 가진 인천에서 살다보면, 운전을 하다 혹은 길을 걷다 거대한 컨테이너나 산업재료를 가득 실은 트럭을 자주 만난다. 트럭이 지나갈 때 아주 미세하지만 땅바닥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가고 트럭-기계에서 나오는 소리, 먼지와 경유 냄새 그리고 싣고 있는 재료들(원목, 고철 쓰레기, 수출용 차 등)의 형상, 냄새, 삐그덕 거리는 소리 등 비주체들이 뭉뚱그려 훅 들어온다. 대부분 안전을 위협받은 짧은 놀람이나 두려움으로 지나치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몸의 이곳저곳의 감각과 연결된 정서까지 섬세하게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에 깜짝 놀란다.
작가 정현의 폐침목 작업은 어린 시절 철길에서 일상적으로 느꼈던 이러한 기억에서 총체적인 감각과 정서를 담고 있다.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거친 폐침목의 흔적에서 ‘겪음의 깊이’와 정서를 발견한 작가는 낮고 보이지 않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 가치를 드러내고 높이는 작업을 한다. 관람객은 첫 번째로 마주하는 메마르고 거친 시각적 형상이 주는 낯설고 어둡고 쓸쓸한 감정뿐 아니라, 경제적 쓸모를 다한 존재가 담고 있는 지난 시간 속 삶의 과정을 상상하고 사유한다. 겪음의 깊이를 가진 비주체들과 만나는 순간의 시공간은 예술을 문화적 향유와 취미로 만나는 일상적인 차원이 아닌, 여러 주체와 비주체의 시간과 공간이 복잡하게 횡단하는 차원을 요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폐침목에선 본질을, 오래되어 어둡고 침침했던 청관에선 깊이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 접했던 은율 탈춤에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의식의 형성을 시작했고 밴댕이, 망둥이 같은 생선에선 제철 신선함이 주는 소중한 의미를 깨달았다. 이러한 4가지는 작가가 자란 지역의 장소성과 관계하지만, 작가는 ‘고향’으로써 지역적 소재와 역사성을 재현하거나, ‘마계’로써 지역의 부재와 결핍을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 속 주체로서의 인간과 삶의 본질을 고민하고 예술가로서 삶을 스스로 조직하는데 좀 더 집중했다.
폐침목, 청관, 은율탈춤, 생선이 가진 타자성을 생각해보니, 인간과 비인간, 장소와 비장소, 주체와 비주체, 자연과 문화, 사물과 생물 등 인간 중심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인간의 본질과 깊이에 집중해온 것은 인간과 자본 중심의 세계에서 주체로서 인간의 본질이라기 보단, 수평적이고 관계적 태도에서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간의 이해와 해석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위한 실천을 위한 것이다. 사물, 공간, 문화, 생물 등 인간과 자본에 의해 가려진 비주체들이 가진 소중한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과 과정을 함께 하는 장소성을 위한 시공간을 담은 작업인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이나 생활문화에서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밝고 착한 감상과 체험의 매개로서의 예술의 역할과 의미가 점점 강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의 역할은 무겁고 어둡고 어렵고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린 시간과 다른 방향의 공간을 가진 작업들이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작가의 설치 작업들은 오래고 깊은 비주체들의 정동적 조각이다. 지역성과 역사성을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사물의 드러내는 특유한 감수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고, 사물 자체의 실질적 표현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 ‘시간의 표현’으로서 실재적이다. 지역성과 장소성을 강조하는 공간 중심적 관점에서 시간성이라는 다른 축으로 넘어가는 존재론적 전회이다.
인간은 자라고 살아온 공간의 장소성에 깊이 관계하며 개인의 세계관과 감수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지역의 장소성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재구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지역 예술 혹은 지역 작가라고 하는 말엔 물리적 공간으로서 지역 그리고 작업과 활동의 소재나 대상으로서의 장소성과 역사성으로 한정 하곤 한다. 작가 정현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의 지역성, 장소성, 역사성과 긴밀하게 관계하기 보단, 수평적이고 관계적인 다종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비주체가 담고 있는 복잡하고 섬세한 시간성으로 소중한 본질을 찾아가고 인간과 자본 중심의 세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재구성하는 다른 지역성으로서 로컬리티를 발견한다.
채은영은 통계학, 예술경영,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도시 공간에서 자본과 제도와 건강한 긴장관계를 갖는 시각예술의 상상과 실천과 관심이 많은 리서치 기반 기획을 한다. 2016년부터 시각예술과 로컬리티, 생태 정치 관련 활동을 하는 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2019.인천문화재단, 아트프렛홈,수평적세계를 켜안는 방법